메인스트리트 : 그때사 그치록덜 살았주기 ⑤ 고원정
메인스트리트 : 그때사 그치록덜 살았주기 ⑤ 고원정
  • 숨비소리
  • 승인 2019.03.0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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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포리 월드컵 2

「도선수」 중에 현역은 세 명이었다.

센터포드엔 이충일형. 호리호리한 체격에 스피드도 보통수준이지만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했다. 학교운동장 구석 「폭낭」 아래 모여 앉은 이들의 하마평에 의하면 「볼을 갈라줄 줄 아는」 선수였다. 하지만 「주색에 곯은」데다 나이 서른이어서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들 했다. 9번.

김시윤형은 옛날 말로 센터하프. 70년대 들어서는 「링커」라고들 하는 포지션이었다. 공수를 조율하는 실력이 단연 발군이었고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볼을 툭툭 발끝에 달고 다니지, 결코 뻥뻥 내지르는 법이 없고, 시합이 끝나도록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늘 왼쪽 손목에 빨간 손수건을 묶고 뛰어서 그런지, 군살 없이 늘씬한 체격 때문인지 왕포리 처녀들에게 인기 최고였다. 5번.

강석훈형은 우람한 체격에 롱킥을 자랑하는 수비수였다. 적진에서 프리킥을 얻으면, 키커로 나서서 대포알같은 강슛을 때려넣는 게 주특기였다. 항상 스타킹을 내리고 뛰는 버릇이 있었다. 4번.

왕포리 대표팀은 이 세 명을 주축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관보선수」들이었다.

「관보선수」란 현재 군대에 가있는 선수들을 말한다. 그것도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베스트 멤버라야만 여기에 해당된다. 시합날이 가까워오면 이장과 마을유지들이 면사무소를 찾아간다. 면장 명의로 군부대에 전보를 친다. 이 게 「관보」였다.

「부친 위독 귀향 요망」

「모친 위독 빨리 귀향 바람」

물론 거짓말이지만, 해당 군부대에서도 반신반의하지만, 어엿한 면장 명의의 관보다. 1주일쯤 휴가가 주어진다. 그러면 시합을 뛸 수 있는 것이다. 이 해 여름의 「관보선수」는 골키퍼 김우진형과 라이트윙 송윤기형이었다. 팬들의 하마평도 그랬고 「만년코치」인 친구형님의 결정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사항들을 일일이 기록해두는 것도 인섭의 몫이었다. 수첩에다 다섯명의 이름을 별 마크와 함께 써넣었다.

이충일, CF.

김시윤, CH.

강석훈, RB.

송윤기, RW.

김유진, GK.

나머지 여섯 명, 그리고 후보선수 2-3명 안에 들기 위해, 맨땅 운동장에선 날마다 치열한 경쟁이 이어졌다. 관중들도 늘어나고, 동네 처녀들까지 끼어들면 연습경기는 열기를 더하게 마련이었다. 슬라이딩 태클에 다이빙 헤징이 난무하고, 두세 명을 따돌리는 화려한 드리블이 나오고 2, 30 미터 거리에서 내지르는 롱슛도 서슴치 않는다. 어이없이 빗나간 볼이 늘어선 측백나무를 넘어 교실 유리창을 깨트리면, 그 또한 기록해두어야 했다. 대회가 끝나고 나면 변상해야 하니까.

「매의 눈」으로 연습경기를 지켜보는 찬구형님의 부담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디 모르는 얼굴이 있겠는가. 후배, 친척 동생, 조카, 친구의 동생, 옆집 아이... 열대여섯에서 삼십대 초반까지, 눈도장을 찍기 위해 땀을 흘리는 선수후보들이 30명은 되었다. 5대1 정도의 경쟁이었다. 전권은 찬구형님에게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골치아픈 존재가 「천만이 삼춘」이었다. 나이 마흔을 넘긴, 이른바 「다까볼 선수」였다. 인섭은 「다까볼」이란 정체모를 용어의 유래를 이때야 처음 알았다.

「다까」는 일본말이었다. 높을 고(高), 「뽈」은 「볼」이니 영어로 하자면 「High Ball」, 즉 높이 차올리는 볼을 이르는 말이었다. 일제강점기 축구선수들은 고을 넣는 것과 별개로, 하늘 높이 차올리는 킥을 일종의 장기자랑으로 여겼다고 했다. 뻥 하고 볼이 날아오르면 관중들은 짝짝짝 박수를 치면서

「삼십척(9미터)이다!」

「사십척(9미터)이다!」

하고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다고.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얘기였고, 그렇게 옛날 스타일로 축구를 하는 나이먹은 선수를 「다까볼 선수」라 불렀던 것이다. 「천만이 삼촌」이 바로 왕포리의 대표적인 「다까볼 선수」였다. 동료선수들에게서 먼저 타박을 받았다.

“삼춘은 무사 나왐수강?”

“삼춘은 무신, 성님이주기.”

“예, 예. 성님. 들어가 쉽서, 제발.”

“나 아직 쌩쌩허여. 조들지 말아.”

고집스럽게 시합에 끼어든 천만이 삼촌이 단독 드리블로 치고 들어가기라도 하면, 나뭇그늘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천만이 안 죽어싱게!”

“돌으라! 돌으라!”

하지만 무리하게 턴 동작을 하다가는 넘어지고, 떼굴떼굴 굴러가는 맥빠진 슛으로 마무리하기 일쑤였다.

“아이고, 저 다까볼 선수...”

“다리가 풀려싱게, 다리가...”

“들어오라! 들어와!”

탄식과 야유에도 천만이 삼춘은 여유있게 손을 흔들어보이며 태연하기만 했다. 한 번은 중학교 2학년인 그 집 딸아이 옥련이가 교문 쪽에 서서

“아버지, 밥 먹읍써!”

하고 외치는 바람에 온 운동장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경기가 끝나면, 피하려 애쓰는 찬구형님에게로 부득부득 다가간다.

“나, 아직 쓸만 허지이?”

“꼭 영 해사쿠강?”

“무사? 부족허여?”

“부족허나마나 나이가 몇이우깡?”

“무사, 나이로 허여? 기술로 허주,”

“......”

“나겉은 사름도 이서야, 보는 사름덜이 좋아허는 거라. 아, 저영 늙은 사름도 혼 몫 허는구나... 용기를 줄 거 아니라게.”

“꼭 부탁햄서, 이?”

“장담은 못허쿠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 마는 찬구형님. 하지만 그가 고심을 하건 말건 천만이 삼춘은 빠지는 법도 늦는 법도 없이 여습에 나왔고, 대회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존재임은 분명했다. 인섭은 수첩에 「백천만」이라 쓰고 이렇게 주를 달았다.

「조미료」 양념. 마지막 다까볼 선수.

「도선수」 세 명이 동시에 나오는 날은 흔치 않았다. 우선 충일이형은 집이 제주시에 있었다. 시윤이형은 시내 술집과 다방가를 누비는 한량이라서 연습을 빼먹은 날이 많았다. 석춘이형만이 개근을 하면서 거의 메일 한 장 꼴로 학교 유리창을 깨곤 했다. 그때마다, 지켜보는 이장이나 청년회장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야! 솔솔 허라, 솔솔!”

하고 위치기도 했지만 석춘이형은 낄낄거리기만 했다.

“솔솔 차민 맛이 납니깡, 맛이?”

“돈이 있나, 임마!”

우리창 한 장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이장이지만, 그래도 통과의례처럼 반드시 거쳐야 할 행사가 있었다. 돼지 한 마리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삶은 고기를 놓고, 운동장에서 막걸리 잔치를 벌이는 게 관례였다. 동도동 대회에 나갈 때도 그랬는데, 이번은 주최측이 아닌가. 경비조달에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고, 선수들과 관중들은 기대에 차있었다.

“걸게 낼 테주.”

잔치는 대회 3일 전인 8월12일로 예고되었다. 그리고 그 날 그 자리에서 대표선수 명단을 발표한다고 했다. 13일이 참가신청 마감일이자 대진추첨일이니 그 이상 팀 구성을 미룰 수는 없었다. 8월 들어 마을회관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인섭은 누구보다도 재정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잔치에 쓸 돼지 한 마리 값을 짜낼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이장이나 청년회장이 빚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부를 약속한 사람들이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대회 자체가 적자로 끝난다는 예상이 지배적인 터에... 이런 소리까지 나오는 것을 인섭은 들었다.

“닭이나 몇 마리 잡앙, 선수덜만 먹는 걸로 넘어가카?”

“선수덜만 입이라? 아, 선수덜만 위행 이 대회를 햄서? 대회가 동네축제 아니냐고.”

“워낙 어려우난 허는 소리주기...”

“어떵 헐 거라? 이 거...”

고민만 깊어가던 8월10일 저녁, 천만이 삼춘 「다까볼 선수」 백천만씨가 마을회관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선언했다. 호기롭게 배를 내밀면서, 이장에게.

“나가, 도새기 한 마리 내놉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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